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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1970년대 한국사회는 어떠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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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표적 금지곡 ‘아침이슬’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노랫말이 곱고 아름다운 이 노래가 방송 금지곡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지의 시대
여러분도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노래는 1971년 가수 양희은이 발표했고, 그해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1975년 이 노래를 ‘가사와 곡이 시기적으로 부적합하다.’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1971년에는 분명 건전가요로 상까지 받았는데 말이에요.
정말로 ‘아침이슬’의 가사와 곡은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실제 이유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자주 불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부는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도, 남성들이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는 이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도 복장과 머리 모양까지도 국가 규제를 받아야 했던 ‘금지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규제가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가 ‘유신체제’였기 때문입니다.
유신, 한국적 민주주의?
이 체제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없었습니다. 전국에서 선발된 박정희 지지자들이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으로 체육관에 모여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지만, 뽑힐 가능성이 없었기에 늘 대통령 후보는 박정희 혼자였고 득표율도 100%에 가까웠습니다.
다음은 유신 헌법에 따라 1972년에 처음 치러진 제8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 선거에서 투표자 대부분은 박정희에게 찬성표를 던졌고 무효 처리 된 2표는 박정희의 한자 이름을 잘못 썼기 때문에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제8대 대통령 선거(1972)
12월15일 대의원 선출: 2,359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 구성
12월23일 대통령 선거 - 투표장소: 장충체육관 - 개표결과: 찬성 2,357표, 무효표 2표
투표자 거의 전부가 한 사람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이런 선거 방식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적합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며 국민을 속였습니다.
유신 반대 운동과 긴급조치
국민의 정치참여를 제한했던 유신체제는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려는 시민과 학생들의 끊임없는 저항을 받았습니다. 박정희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불이 붙었습니다. 박정희의 가장 큰 정치적 경쟁자였던 김대중을 1973년 일본에서 중앙정보부가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중앙정보부: 국가 안보 관련 정보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한 정보기관. 정상적인 정보활동보다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등 악행으로 더 유명했다. 현재는 ‘국가 정보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김대중은 겨우 풀려났지만, 자신의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가택연금’을 당해 사실상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에도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했습니다. 긴급조치가 뭐냐고요? 유신 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비상조치와 비상명령을 말합니다. 다음은 ‘긴급조치 1호’의 주요내용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을 만들고 고치는 일은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해야 합니다. 또한 국민은 헌법을 개정할 때에 그에 관한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긴급조치로 이 모든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관의 영장 없이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람들을 체포했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국민이 아니라 긴급조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운동이 커질 때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앞세워 국민을 탄압했고, 1975년에는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9호’가 발령되었습니다. 이 조치에 따르면 긴급조치의 시행을 담당하는 장관의 명령과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장관의 명령 한마디가 곧 법이었다니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뒤이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학생회가 폐지되었습니다. 유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학교를 군대와 같이 통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 속에서도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시민들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다음 제시문은 유신 헌법(1972년 개정)과 현재 헌법(1987년 개정)의 주요 내용입니다.
현재 헌법 (1987)
01. 유신 헌법은 ‘권력분립의 원리’를 위반했습니다. 문제가 되는 헌법 조항을 찾고 그 이유를 다음 도표와 현재 헌법을 참고해 설명해 보세요.
1) 문제가 되는 헌법 조항
02. 현재 우리 헌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개정한 헌법입니다. 이 헌법을 유신 헌법과 비교해 볼 때에 6월 민주항쟁 당시 국민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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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역사란 무엇일까요? 역사는 왜 배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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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일까요? 역사는 왜 배울까요?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올바로 설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역사가 과거 사실을 공부하 는 학문이지만,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살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 의 바람직한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책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덕목은 무엇이며,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뿌리가 내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꽃이 핀 민주주의와 인권,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 정신을 더 확 실하게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공부하면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 그 자체만을 탐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행 과정은 간단히 살펴보고, 5·18정신인 민주·인권·참여·공동체 정신의 가치를 찾는 데에 집중 해 우리 사회를 넘어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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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항쟁 기간에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살았나요? 다른 지역 사람들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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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언론보도는 물론이고 외부로 연결되는 모든 수단, 전화, 기차, 시외버스 등을 차단하고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항쟁 기간 광주는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광주 시민 스스로 규칙을 정해 질서를 지키며 스스로 통치를 했습니다. 그때 절도나 공공기관에 대한 침탈행위가 없었으며 부녀자들은 조를 짜서 음식을 해서 나누어 먹고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피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시장에서는 무료로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는 등 시민공동체, 절대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소중한 경험입니다. 한편, 일부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광주로 들어와 투쟁에 합류하거나 관공서, 탄광 등에서 무기를 획득해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의 왜곡 보도로 인해 광주의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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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시민들이 왜 총을 들었나요? 누가 시민군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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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학살하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은 국민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일부 청년들이 광주와 가까운 화순, 담양, 나주, 남평 지역의 파출소와 무기고를 찾아 무기를 탈취하면서 동시에 시위의 확산을 전개합니다. 경찰의 피신과 지역 주민의 협조로 시민군은 순조롭게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들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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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군인들도 많이 다쳤다는데, 사실인가요? 군 부대간 오인 사격도 있었다던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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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보고서에 의하면 항쟁 당시 23명의 군인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주요 사망원인은 군부대 사이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총상 사망자입니다. 특히 1980년 5월 24일 오후 2시 광주와 목포 간 도로변에 있는 진월·송암동에서 벌어진 군부대간 오인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주남마을 주둔지를 보병 제20사단에게 인계하고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송암동 효천역 근처에 매복해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군인 9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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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가족들이 유공자로 인정되면서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데 사실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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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도청이 진압된 이후, 5·18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고, 고문과 구타 등 폭력에 시달렸으며,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항쟁 과정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1988년 광주청문회에 의해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전까지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피해자, 그 가족들은 그 슬픔과 분노조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감시와 처벌이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다행히도 1997년 5월 18일이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이 되고, 2002년 제정된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유공자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상황과 참여를 증빙해야 하는 절차 등을 거쳐야 하므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유공자가 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유공자가 되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을 대신할 순 없겠죠? 반면에 5·18 당시 시민군 등의 진압 공로로 서훈을 받은 인사는 모두 91명입니다(대통령, 국무총리 표창자 10명 포함). 이들 가운데 현재 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대우를 받고 있는 인사는 박준병 당시 20사단장을 비롯해 13명의 군인들이 있습니다. 정부는 유공자 중 상당수가 위관급 이하 군인으로 상명하복의 군 조직 특성상 이들에게서 훈장을 뺏는 것은 군 위계를 흔들 수 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서훈치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에는 5·18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정신질환을 앓게 된 진압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 전령병이었던 김○○은 진압군으로 투입됐다가 1981년 전역했고, 4개월 만인 1982년 3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김○○은 진압군 투입 당시 '학살을 멈추라'고 요구하다 동료·상관 등과 주먹다짐도 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쟁을 진압한 군인과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동시에 유공자가 되어있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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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다른 나라에서는 5·18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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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면 세계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광주를 찾아 5·18영령이 잠들어 있는 국립5·18민주묘지에 들러 그 뜻을 기립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광주는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항쟁 당시,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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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다른 지역 사람들은 5·18에 대해서 왜 잘 모르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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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당시 언론은 신군부의 권력찬탈 음모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의 정의로운 행동을 폭동이라 낙인찍었고, 광주시민을 폭도라 불렀습니다. 광주로 향한 모든 전화와 교통수단이 마비되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다른 지역사람들은 언론의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기에 심지어는 유가족조차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많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5·18 단체와 광주 시민들이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이 마침내 국민과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광주시민은 폭도의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신군부와 그 정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5·18을 광주만의 일로 축소하고 왜곡시키는 일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보다 오히려 국내에서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 5?18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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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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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경제 개발 등을 이유로 전 세계에는 많은 군부, 독재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일어난 항쟁은 군부독재, 개발독재 하에 있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9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 1988년 미얀마의 8888민주항쟁, 1991년 타이의 5월 시민혁명, 1998년 인도네시아의 5월항쟁 등을 찾아보세요. 그런데, 아시아에서만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축구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guerra sucia)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1976년 3월 24일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좌익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1983년까지 8년 동안 무제한의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납치·구금·고문·사살·처형하였습니다. 한 인권단체의 비공식집계에 따르면,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강제 실종 3만 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 명이며, 정치적 망명자 또한 3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희생자들 또한 노조지도자, 노동자, 정당지도자, 정당인, 임산부, 학생, 성직자, 교사, 작가, 언론인, 지식인, 어린아이, 외국인 등 각계각층에서 속출하였습니다. ‘추악한 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무장 게릴라 단체는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이내 괴멸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 누구도 ‘추악한 전쟁’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는 공포의 상황이 지속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강제 실종되었습니다. 1977년 4월 13일 오후, 어머니 14명이 ‘5월 광장’ 동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강제 실종된 자식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도무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궁(Casa Rosada)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5월 광장’에 모인 것입니다. 오후 3시 15분이 되자 어머니들은 가방에서 흰 수건을 꺼내 머리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거창한 구호도, 요란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원을 그리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광장에 나타나 3시 30분부터 4시까지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몇 달에 걸친 집요한 요청 끝에 5월 광장 어머니들은 내무장관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5월 광장 어머니들의 시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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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진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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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은 민주화를 저해했던 군사독재, 억압과 폭력의 사회적 분위기를 국민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특히 저항권의 정당성과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받았다는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 상부상조, 정서적 유대 그리고 평화가 꽃피웠던 1980년 5월 22일에서 27일까지의 해방 광주의 자치경험은 국가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시민사회의 자율과 자치의 가능성을 암시해준 매우 희귀한 사례로써 시민사회 자율성의 최대한의 신장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민주화의 이념과 미래상을 탐색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자 자산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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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보 ] |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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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폭압에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저항했던 정신, 그리고 남녀노소를 넘어 넝마주의, 학생, 농민, 노동자, 지식인, 예술가 등을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위기상황에 대처했던 공동체 정신, 1980년 5월 27일,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켰던 희생 정신 그리고 이 뜻을 이어가고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정의감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꽃피우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