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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광주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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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전두환 회고록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 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 조차 없었다. 파출소는 물론 경찰서 까지 경비병력 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모두 피신해 보안사령부로서는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안부대 요원이나 정보부 요원은 경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경찰이 존재해야만 치안이 유지되고 치안이 유지되어야만 정보부 요원도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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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5·18’이 발생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보안사령부는 광주 현지로 보안사 요원들을 파견했다. 5. 19. 09:00경 보안사 참모회의에서 광주상황에 대한 토의가 있은 뒤 당시 보안사 기획조정처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최예섭 기획조정처장은 광주에 도착, 전교사령관 부속실에 기거하며 상황 파악을 했고,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보안사는 항쟁 당시 정보수집과 특수 활동 뿐 아니라, 연행자들에 대한 수사에도 관여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105보안부대장인 최경조 대령을 파견, 수사를 직접 지휘했다. 전 씨가 회고록에서 주장한 보안사의 기능 실종은 진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안사는 광주민주화운동 초기부터 진압, 수사, 체포, 특수임무 등을 직접 수행했거나 지휘했다. 보안사 기획조정처장의 광주 파견을 사령관이 모르거나, 무관하다고 과연 주장할 수 있는가.
5월 27일 이후 금남로에 진주한 탱크
80년 5월23일 낮 12시경 광주비행장에서 전교사 사령부로 비행하던 UH-1H 헬리콥터 안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필 메모를 보았다. 광주비행장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만나 전교사로 가는 도중 정 사령관이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읽고 있기에 이를 옆에서 잠깐 읽어보니 전 보안사령관의 친필 메모였다. 메모엔 ‘무리가 따르더라도 조기에 광주사태를 수습하여 달라’는 취지의 당부와 함께 전 보안사령관의 사인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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